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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커피가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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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3-17 05:15 조회 53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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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유명한 저널 'European Heart Journal' 에서 미국 성인 4만 명을 대상으로 10년간 관찰 연구한 결과, 매일 커피를 오전에 석 잔 이하 마시는 것이 하루종일 마시거나 전혀 안 마시는 것보다 심혈관계에 좋다고 발표했다. 중요한 건 커피를 마시는 시각이다. 오전에 마시는 게 가장 좋다. 물론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다. 그게 한국인에게도 적용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커피는 과학적 효과를 떠나 심리적으로 느끼는 정서적 가치 또한 매우 크다.

아침에 커피를 내려 호흡하면서 글을 쓰는 일이 나에겐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동맥류 시술을 받은 이후 술과도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대신 커피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좋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 커피는 나에게 동료이자 위로를 건네는 친구 같다. 내가 전공하는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게도 커피는 동반자였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유대인 교수로 살면서 받아야 했던 스트레스를 달래주는 게  커피였을 것이다. 제자인 하이데거에 의해 정신적 핍박을 받으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게 커피가 아니었을까? 후설은 자신들의 제자들과 함께 커피의 현상에 대해 기술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 커피는 검고 따뜻하며 수증기가 보이며, 마시면 씁쓸하지만, 나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를 기술하면서 수십 장의 원고들을 제자들과 함께 채워나갔다.(출처: 나무위키)


지금 나의 의식에 가장 생생하게 주어지는 현상은 커피의 향이다. 이 향은 의식에 원본적으로 주어지는 살아있는 체험이다. 이 생생하게 체험된 현상이야말로 사고의 출발점이다. 철학은 생생한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헤겔의 관념론이 유럽을 지배했던 시기, 생생한 현실이 이념에 의해 추상되었다. 철학은 이제 더 이상 관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관념은 이 생생한 현실이 희미하게 바래진 것이다. 생생한 현실은 인상(印象)이다. 의식에 강하게 각인된 상이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그리고 레이몽 아롱이 카페에서 그들 앞에 있는 칵테일 잔을 가리키며 이게 바로 철학이라고 했었다. 철학은 생생한 사태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사르트르와 아롱은 이념으로 잠시 갈라졌었지만, 현실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후설에겐 커피가 철학이다. 철학은 이념이 아니다. 맑스도 가장 두려웠던 게 자신의 철학이 이념으로 변질되는 거였다. 지금 바로 여기 내 의식 속에 가장 생생하게 주어지는 건 바로 커피 향이다. 그래서 커피가 바로 철학이다. 내 앞에 원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에서 새롭게 출발하자는 게 현상학이다. 현상을 기술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상을 본질의 외피 정도로 착각해왔다. 하지만 현상은 본질과 다른 게 아니다. 커피의 본질을 떠난 현상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커피는 단순한 현상으로만 지각되지 않는다. 항상 나에게 체험된 현상인 본질로 주어진다. 이 본질을 직관하는 게 현상학이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을 내려놓고 싶다. 생각은 온갖 상념을 불러온다. 그 상념이 현실을 왜곡하는 통로가 되어 왔다. 마침 오늘 아침 고등학교 동기 윤 회장이 좋은 글을 보내왔다. 나이가 들수록 걱정을 덜어내라고. 줄이라고.

쓸데없는 사념(思念)을 덜어내고 줄이는 게 철학이다. 에드문트 후설의 말이다. “모든 걸 내려놓아야 모든 걸 얻는다.” 아무리 내려놓으려 해도 커피의 진한 향이 나의 의식 속에 생생하게 주어져 있다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어중간한 철학은 현실을 떠나지만 진정한 철학은 현실로 돌아온다. 삶은 현실이다. 그래서 커피가 철학이다.


<김영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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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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