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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서설(瑞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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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3-03 02:39 조회 58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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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눈이 인색한 도시다. 올들어 첫눈이다. 많은 눈이다. 눈이 오면 세상 모두를 희게 만든다. 모든 게 평등한 존재가 된다. 서설(瑞雪)이 상스러운 건 이런 이유에서 이기도 하다. 눈이 모든 걸 평등하게 만들지만, 대한민국호 설국열차는 여전히 달린다. 기차 꼬리 칸과 엔진이 있는 앞칸 사이엔 넘지 못할 강이 여전히 존재한다. 


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지하철에서 3시간 안내 근무를 한다. 그 누군가에겐 ‘지하철’과 ‘노인’이란 어휘는 열차의 꼬리 칸을 사는 마이너 인생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영화〈기생충〉에서 보여준 ‘지하’와 ‘지상’ 그리고 ‘계단’이란 메타포들은 설국열차의 또 다른 장면들을 연출한다. 우린 어차피 지하와 지상을 이어주는 계단을 올라가는 데서 삶의 쾌락을 느끼며 살지도 모른다. 지하 단칸방에서 지상 월세로 그리고 자가 단독 주택으로 신분 상승하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자가를 갖고 대기업 부장으로 사는 삶을 꿈꾸는 대한민국 중년들이다.


어제 근무 중 6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분이 느닷없이 ‘안 부끄럽능기요?’라며 혼자 말로 크게 말한다. 그때 나 외에 아무도 없어 나보고 하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부끄러운 줄 아소’라고 꾸짖듯 말한다. 난 대응하려다 일면 타당한 말일 것 같아서 ‘예 좋은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하고는 자리를 옮겼다. 그분은 차를 탈 때까지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를 반복적으로 독백한다.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도대체?


내가 그리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노인들 챙겨주느라 결국은 젊은 사람들이 부담을 지고 있다는 말인 듯하다. 쉬는 시간에 같이 근무하는 최 선생님이 겪은 일을 말해준다. 걷기 불편해 보이는 노인(?)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걸 보고 걱정이 돼 뒤따라 올라갔다고 한다. 걱정한 대로 그분이 뒤로 그대로 넘어지는 걸 순간적으로 몸으로 막아 안전하게 타고 올라갈 때까지 안내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지하철에 근무하는 노인이 그냥 멍하니 서 있는 게 나랏돈을 허비하는 것으로 보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나름 안전 교육을 충실하게 받고 자기 일에 성실히 임하는 근무자들이다. 최 선생님 얘기를 들으니 내가 당한 일이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세상을 지하와 지상으로 경계를 가르듯 살 수는 없다. 지하철에서 근무하는 노인이 설국열차의 꼬리 칸을 타고 있는 사람으로 보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 칸을 타고 가든 꼬리 칸을 타고 목적지는 같다.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기차다. 누군가는 그 여행길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 누군가에겐 아직 많이 남았을 뿐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노인이 된다. 노인은 그저 늙은이가 아니다.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테이레시아스는 미래를 예언하는 맹인 노인이다. 테바이 왕들이나 오디세우스가 그에게 삶의 길을 묻는다. '논어' '미자편'에 나온다.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다가 뒤쳐졌다. 뒤쫓아가는 도중에 지팡이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어깨에 매고 있는 노인을 만나 물었다. 우리 스승님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손발을 움직여 일하지도 않았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찌 스승이라 하겠는가"라 말하고는, 지팡이를 땅에 꼽고 풀을 뽑기 시작했다… 다음날 자로는 노인을 떠나 공자를 뒤쫓아와서 이 이야기를 했다. 공자는 은자로다 감탄하며 자로에게 되돌아가서 다시 한번 만나고 오라고 하셨다. 


시간은 우리를 지혜로운 자로 연단시킨다. 우린 모두 시간적 존재다. 시간은 오고 간다. 모두를 평등하게 하는 시간의 신(神) 크로노스다. 시간을 초월할 그 누구도 없다. 시간 앞에 겸손해야 할 이유다. 우린 모두 시간 열차를 타고 가는 동반자들이다. 나에게 부끄러운 삶을 살지 말라고 충고해 준 어제 그분 역시 나와 같은 여정을 떠난 동반자이다. 


<김영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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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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