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칼럼 분류

[이종암의 한국 명시 산책] 이규리 <월정사 귀고리>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월정사 귀고리> -이규리


우연히 여행 가방에 넣어 간 프리다 칼로 화집

밤늦도록 넘겨 본 탓인지

이튿날 아침, 눈 내린 전나무 숲길 지날 때

높은 가지에서 그녀가 툭, 툭 떨어졌다


하얗게 부서진 살과 뼈들

눈송이 주무르듯 뭉치고 깎아

얼기설기 이어 박은 채

석탑처럼 십 년 또 십 년, 좌선하던 여자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

모서리에 달린 일흔 두 개의 귀고리는

덜걱거리는 그녀 몸에 박힌 쇠못과 경첩이다

몸이 된 쇠붙이들이 내는 풍경 소리


구도는 일흔두 번쯤 하혈한 여자의 탄력 없는 자궁처럼 열리는 걸까


석탑 아래 피냄새 맡은 이른 홍매

지저귀듯 촘촘

작고 붉은 귀고리 달았다


-이규리 시집『뒷모습』(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 
며칠 전에 본 텔레비전 뉴스는 강원도 산간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고 했다. 아직 그 눈들이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 숲길에 남아 있을까. 내가 제일로 다시금 찾아 가고 싶은 곳이 바로 월정사 그 전나무 숲길이다. 이규리의 시「월정사 귀고리」는 그곳에 있는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과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를 한데 섞어 만든 풍경화다. 그 그림은 프리다 칼로가 여자이듯 온통 여성의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석탑처럼 십 년 또 십 년, 좌선하던 여자”가 프리다 칼로이고 동시에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이다. 그래서 이규리 시인은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의 몸 일흔두 곳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귀고리’라 명명(命名)한다. 또 일흔두 개의 귀고리를 한 여인의 하혈 냄새를 맡은 석탑 아래 홍매가 피워 올린 작고 붉은 꽃을 또 귀고리라 한다. 우리는 이 그림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정말 구도(求道)는 “일흔두 번쯤 하혈한 여자의 탄력 없는 자궁처럼 열리는 걸까”. 그것이 못내 궁금하다.

db3072163f3d90cc14ceaee075cbca56_1780942339_3722.jpg

시인 이종암(mulgasarang@hanmail.net) 

1999년 동인지《푸른시99》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으로《물이 살다 간 자리》로 등단. 발간한 시집은《저, 쉼표들》,《몸꽃》,《꽃과 별과 총》등이 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