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가족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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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려고 서두르다가 할머니가 들고 서 있는 장바구니 캐리어에 걸려 넘어졌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넘어지니 아프다는 생각보다 창피해 얼른 버스에 올랐다. 오른쪽 무릎은 까지고 왼쪽 허벅지 통증이 심하다. 일주일이 지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다행히 골절은 피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대구 북구 칠곡 든든한병원에 왔다. 지상철을 타고 오는 과정 자체가 치유다. 날씨도 한몫한다. 명덕 역에서 탔다. 스쳐지나는 정류장마다 옛 생각도 스친다. 서문시장을 지나 북구청 역이다. 인근 아파트에서 근 10년을 살았다. 당시 대구에서 가장 높았던 38층의 18층에 살았다. 53평이다. 욕실 두 개, 방 다섯 개 그리고 대구백화점에서 고가(?)로 산 무거운 양탄자가 깔려 있는 넓은 거실 그리고 베란다 전체를 점령한 다육이들 등등.
북구청 역을 지나 칠곡 태전 역이다. 주택청약을 넣어 줄 서서 기다려 신청하고 선정되어 이곳 25,7평 아파트에서 살았다. 넓은 데로 이사 오기 전이었다. 참 바쁘게 살았던 젊은 시절이었다. 집사람이 퇴근하기를 창문 내다보며 기다렸다가 뛰어내려가 같이 집으로 올라오곤 했었던 시절이었다. 좁아도 넓은 데로 이사 온 후보다 더 좋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족은 흩어졌다. 아들은 구미에 딸은 프랑스 파리에 산다. 집사람은 예전 내가 근무했던 대학 인근에 본인이 사두었던 땅에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난 97세 노모를 모신다(?)는 핑계로 대구에 따로 산다.
세월이 지나면서 물리적 공간만 그저 바뀐 게 아니다. 삶의 매듭도 많이 바뀌었다. 현대 사회 가족의 가치를 생각해 본다. 가족 자체의 가치가 존중되었던 가족주의 시대는 지나간 듯하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가족은 말 그대로 같은 집에 사는 무리다. 개체가 '가족'이라는 보편에 귀속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보편보다 개체의 개별성이 더 중요하다. 가족이라는 희미한 끈을 놓지 않은 채 흩어져 산다. 가족 역시 같은 무리가 아니라 생각이 다 다른 무리다. 다양체들이다. 다중 공동체다.
개인-가족-국가를 변증법적 발전 단계로 설명한 독일 철학자 헤겔이다. 가족(사회) 이 개인보다 그리고 국가가 가족이나 개인보다 더 우선이다. 개인과 가족 사이의 모순이 지양되어 실현된 최상의 인륜 공동체가 국가다. 독일 나치즘이 이 토대 위에 서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는 다르다. 들뢰즈가 보기에 헤겔의 개인-가족-국가 질서는 수목형 사고의 절정이다. 이 세 단계가 특수한 조직으로 서열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세 단계는 뿌리처럼 수평으로 이어진 다양체다. 계급적 질서는 없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68혁명 정신이 들뢰즈에게 계승되어 있다.
각기 다른 개인이 다양체로 공존하는 게 가족이고 국가다. 가족이나 국가의 질서에 순응해 사는 개체가 아니다. 국가가 파 놓은 홈에 정주하는 개체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영토를 만들기 위해 패인 홈을 메꾸어 매끈한 영토를 만들고 그곳을 질주하는 개체들이다. 더 이상 '가족'의 이름으로 개인을 그 홈에 주저 앉힐 수 없다. 구성원 개개인의 생각이 가족으로 환원되지 않는 이유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구성원이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서로 달라 더 소중하다.
아버지가 아들의 원본일 수 없다. 물론 유전학적 원본은 될지 모른다. 유전학적 가족 유사성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개체의 개별성을 가족 유사성으로 환원하는 건 맹목적 가족주의다. 가장 극단적 형태의 가족주의가 내포티즘(nepotism)이다. 정치-경제 권력을 가족에게 이양하는 것이다. 한국 대기업이 재벌로 평가절하되는 이유다.
대구 3호선은 지상철이다. 맨 앞 좌석에 앉아 병원에 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젖었다. 달리는 전철만큼 세월이 빠르다. 이제 종착역이 그리 멀지는 않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영원히 안주해야 할 집으로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이 더 절실하다. 어린이 날인 오늘 멀리 파리에 있는 손녀 지아가 보고 싶다.
<김영필 교수>

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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