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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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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라디오가 더 좋아진다. 좋아하는 노래를 라디오로 듣는 게 너무 좋다. 지금 막 흘러나온다. “사랑이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나의 사랑 그대여/ 내 마음 아나요/가슴 속을 파고드는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러도/....../ 그대를 사랑하오.”

한때 많이 불렀다. 라디오는 때론 기대하지 않았던 추억을 선물한다. 우린 보는 데 익숙하다. 보는 게 훨씬 더 실감이 난다. 그렇다. 하지만 보는 것과 듣는 걸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있을까? 들으면서도 본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서 듣는다. 들으면서 보는 게 훨씬 더 상상력을 촉발한다. 보는 건 시각에 제한된다. 내 앞 머그잔의 뒷면조차 보지 못하는 게 눈의 한계다. 


하지만 듣는 건 자유롭다. 듣는 건 무엇이든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허락한다. 듣는 건 보는 것보다 겸손한 태도다. 눈은 사물을 대상화하는 감각기관이다. 사물을 자신의 시각 아래 놓으려는 오만한 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게 진리라고 단언한다. 철학도 결국 보는 행위다. 다만 이 경우는 ‘통찰’을 뜻한다. 꿰뚫어 보는 것이다. 이건 마음의 몫이다. 눈을 감고 들으면서 사물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멀어질수록 그 소리를 들으려고 모든 걸 내려놓는다. 그저 60이 되는 게 아니다. 귀가 순해져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들으려는 나이다. 공자의 60세의 삶이 그랬다(?).


철학은 결국 듣는 것이다. 존재의 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겸손하게 듣는 것이다. 들은 대로 말하는 게 철학이다. 말은 들음에 응답하는 것이다. 독일어 Ent-sprechen이다. 존재에 응대하여 답하는 게 언어의 책무다. 말하는 주체는 사라진다. 존재의 편에서 들려오는 걸 그대로 말하기 위해 말의 주인 노릇을 해온 주체는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이 말을 한다”는 괴팍한 말을 한다. 주체가 존재에 응답하는 종이 되어야 할 이유다. 


타인의 존재라는 빛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것, 그게 철학함이 아닐까? 철학은 결국 타자를 위한 향연이다. 근대 주체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타자를 세우는 게 탈근대이다. 주체는 이제 주인이 아닌 종이다. 타인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존재의 소리에 귀를 닫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로 다가가려는 노력은 결국 귀를 여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용기다. 타인의 존재를 멀리서 넌지시 바라보며 대상화하는 오만은 시각적 주체를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순(耳順)이 물리적 햇수 60을 의미하지 않는다. 귀가 순해지는 나이다. 그래야 전지적(全知的) 나의 시점에서 해방될 수 있다. 나이가 60이면 귀에 귀뚜라미 소리도 난다. 이명이다. 나도 이명이 있다. 요즘 감기 기운이 있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어쩔 수 없다. 귀에 낯선 방문객이 찾아온 건 타인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더 순해지도록 훈련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낯선 이방인도 갑자기 사라지면 오히려 어색하다. 듣는 걸 방해하는 낯선 타자가 찾아온 게 이명이다. 그러니 이명이 없으면 좋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나를 더욱 겸손하도록 독려하는 소리로 들으면 좋겠다.


방금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인 이문재의〈농담〉의 마지막 구절이다. 시인의 탁월한 어휘 선택에 귀가 겸손해진다. 때론 라디오가 귀를 순하게 한다.


<김영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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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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