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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아틀리에 탐방] 기억의 물성 - 윤미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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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지 작가


작가 윤미지는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흔적을 재구성을 통해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과거 제과사(pâtissière)로서 다루었던 ‘설탕’처럼, 그는 시간이 흐르면 녹아 없어지거나 쉽게 변형되는 덧없는 재료들-종이, 빛, 인쇄된 이미지-을 통해 보이지 않는 기억의 층위를 가시화해 왔다. 대만 마두(Madou)의 옛 설탕 공장에서 잊힌 전설 속 ‘푸른 뱀’의 비늘을 설탕으로 빚어 낸 작업은, 시간이 지나며 변하거나 사라질 운명을 지닌 ‘가변적 재료’들을 통해 지역의 잊힌 집단 기억을 투사하며 기억의 물성을 부여한 사례다. 지나가버린 순간의 흔적이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다양한 재료들 가운데, 그가 선택한 사진은 단연 ‘기억’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매체다. 사진은 태생적으로 시간과 부재, 망각과 상실의 감각과 연결되어 있으며, 미술사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으로도 개인의 추억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 집단의 기억을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윤미지의 작업은 사진이 가진 이러한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기억의 불완전함과 흔적, 나아가 망각의 과정까지 드러내고자 한다. 사진을 자르거나 겹치고, 설치와 결합해 공간 속에 배치함으로써 기억이 축적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동시에, 공간 자체를 기록을 넘어선 하나의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작업이 흑백 필름사진(photo argentique)의 매체적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시간의 흔적과 물질성을 드러내며 기억의 감각을 더욱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디지털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이중적 장치를 통해, 그가 발견한 기억의 흔적들조차 디지털 시대 안에서는 결코 고정되거나 온전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것임을 드러낸다. 나아가 그는 이미지의 중첩, 데이터 변형, 픽셀화, 인쇄, 그리고 사진을 자르거나 구기고 연결하는 방식 등을 설치와 결합함으로써, 평면 이미지를 단순히 잊힌 이야기를 소환하는 매체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새롭게 체험되는 과정 자체임을 보여준다. 자연이 남긴 흔적과 기억, 그리고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하며 시간의 층위를 설치 작업으로 풀어내는 윤미지 작가,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구축해가는 그를 작업실에서 만났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한국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만화창작과를 졸업했다. 이후 제과사(pâtissière)로 일했다. 그림은 프랑스에 오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미술고등학교 이후 제과사의 길을 선택한 점이 인상적이다.

막상 고등학교에 들어가 보니 그림 잘 그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줄곧 그림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제과사라는 직업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자격증을 취득하고 제과사로 4년 정도 일했다. 


-그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제과사(pâtissière)로 일하던 중 일본 도쿄로 워킹 홀리데이를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2011년 동일본 대지진(쓰나미)으로 출국 직전 모든 계획이 취소됐다. 이후 친구가 프랑스 스트라부르의 아르데코 학교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학비도 비교적 저렴하고 제과 분야도 나쁘지 않다며 프랑스를 추천했다. 프랑스로 왔지만 제과 관련 학교는 대부분 사립이라 학비가 예상보다 비쌌다. 어학 과정만 1년 마치고 돌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원래 사진이 취미였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술 쪽으로 방향이 이어진 것 같다. 이후 지방의 작은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만화 전공 이후 순수 미술로 전공을 바꾸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에는 HEART, 페르피냥(Perpignan)의 순수미술 과정에 입학했다. 사실, 그림과 책 제작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분야로 알려진 에피날(Épinal)의ESAL 국립예술학교에 재입학해, 이미지-내래이션 과정(판화,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이후, 설치 미술에 크게 매력을 느껴 파리 1대학 판테옹-소르본 으로 편입하여  조형예술 학사와 석사과정을 마쳤다. 


-설치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

에피날 학교는 메츠(Metz)의 미술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때문에, 일본 작가이자 파리 보자르 교수인 카와마타 타다시의 작품 ‘언더 더 워터(Under the Water)’가 메츠 퐁피두 센터에 설치될 때, 에피날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인턴쉽 기회가 주어졌다. 이 작품은 쓰나미 기억을 주제로 한 설치 작업으로, 천장 구조물이 떠 있는 듯한 형태를 통해 관객이 물속에 잠긴 듯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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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an, digital photograph, 2026 

브르타뉴 레지던시 동안, 썰물 이후 바닷가에 드러난 흔적을 담은 사진 작품


당시 작업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학생 인턴을 모집했는데, 개인적으로도 카와마타 작가의 작업을 좋아 했고, 쓰나미라는 주제가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약 3주 정도 인턴십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때 직접 설치 작업에 참여한 경험은 매우 인상 깊었다. 그 후, 파리 1대학을 다니며 카와마타 교수가 진행하는 교환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설치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대학과 보자르 수업을 병행하며, 주로 어떤 고민을 했는가 ?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작업이 무엇인가’ 였다. 특히, 사진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하면 평면을 넘어선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을 많이 했던 시기였다.  그런 과정들이 쌓여서 현재의 작업 방식이 만들어진 것 같다.


-사진이 작업의 주요 매체가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 

어릴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가 사진관을 운영하셨는데, 아무래도 그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필름과 인화물에 친숙해진 거 같다. 평소에도 사진을 많이 찍고, 그림 그리는데 활용하고 했다. 


-사진 외에도 설탕, 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사용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을까? 

내 작업에서 사진은 단순한 기록 매체라기 보다, 파티시에 시절 다루었던 ‘설탕’ 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재료라고 생각한다. 설탕이 열에 녹고 형태가 변하며 덧없이 사라지듯, 사진 역시 빛에 반응하고 시간이 흐르며 바래는 가변적인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대만 마두(Madou) 레지던지 당시 옛 설탕공장이라는 장소성에 주목해 설탕으로 비늘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눈먼 푸른 뱀’이라는 지역의 잊힌 전설을 소환하기 위해 설탕이라는 재료를 선택했다. 당시, 나에게 설탕은 제과사로 일했던 과거의 나와 예술가로서의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주는 하나의 예술적 매체로 치환되는 재료였다. 또한, 설탕은 빛을 투과시키는 물질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공기 중 습도 등에 따라 녹아 내리거나 결정이 변한다. 이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물질’을 통해 ‘잊혀져가는 기억’을 붙잡아 가시화하는 과정은 사진을 구기거나 자르고 설치하는 방식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주로 어떤 방식의 설치 작업을 하는가 ?

주로 사진을 활용한 설치 미술 작업을 한다. 사진은 오랫동안 개인적인 취미이긴 하지만, 단순한 사진 이미지 자체만으로는 작업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사진을 구기거나 자르고 연결하는 여러 시도를 거치면서 설치 작업으로 확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광 사진 프린트를 구겨 공간 전체를 하나의 동굴처럼 만드는 작업이 있다. 유광 프린트는 빛을 받을 때 반사되며 특유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반짝거리는데, 어두운 공간 안에서 랜턴 빛을 비추며 실제 동굴을 탐험하는 듯한 감각적 경험을 유도한다.  


-동굴 형태의 설치 작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

아르메니아와 포르투갈 등지에서 촬영한 광물 사진들을 활용한 작업이다. 작품 속 광물들의 조합은 현실에서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풍경들이다. 운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낯선 행성의 표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의 조합이 파리 도심 한가운데 설치된다면, 마치 하룻밤의 꿈 같은 비현실적인 경험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15구에서 열린 개인전이었는데, 공간이 매우 협소했다. 벽에 작품을 거는 방식보다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동굴처럼 변형시키는 편이 더 흥미롭고 색다른 경험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광 프린트들을 구기고 연결해 관객이 실제로 공간 안을 탐험하듯 경험할 수 있는 설치 작업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 

자연이 남긴 흔적, 자연의 이미지, 돌, 종이, 빛, 설탕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전설이나 잊혀질 수 있는 것, 덧없음, 지나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을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가시화 하는 작업을 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간 속에서 흔적을 찾고,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연결 지점에 주목한다. 대표적인 예로, ‘조간대’ 작업의 경우, 밀물과 썰물이 드러내는 공간에 집중하여 현장에서 드러나는 자연의 형태를 사진으로 수집하고 이를 콜라주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일본 조가시마, 브르타뉴, 아이슬란드 등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촬영한 조간대 장면을 자르고 붙여 하나의 이미지로 완성한 것이 핵심적인 접근 방식이다. 물에 잠겨 있을 때와 드러날 때 각각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점이 흥미로웠고, 물과 파도가 이곳저곳 이동하며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장면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이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형상을 작가가 수집하고 편집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 과정 속에서 나 자신 또한 자연의 일부 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작업의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는가 ?

여행을 많이 하는 편이다. 여행을 하면 낯선 환경 속에서 평상시에는 지나치기 쉬운 요소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현장에서의 조사와 기록 과정 속에서 소재를 발견하고, 이를 작품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주로 흑백 사진을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

오랫동안 흑백 사진 작업을 해왔다. 색채 자체에서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디지털 기반 작업을 많이 하는 만큼 흔적이나 시간의 쌓임 등 내가 다루는 주제에 더 집중하기에는 흑백 사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흑백 작업을 지속해왔다.  다만,  최근에는 컬러 사진 작업에 도전했다. 지난 4월 한 달 동안 브르타뉴 레지던시에 참여해 사진 작업을 진행했는데, 현지에서 본 암석의 기묘한 색감과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면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업들은 오는 6월 브르타뉴 야외 사진전에 출품할 예정이다. 


-회화,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

작업은 내게 일이라기 보다 하나의 취미 같은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직업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레지던스에 참여할 때도 그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 신나고 재밌다. 즐거움이 작업의 주요 동기다. 작업을 위해 원동력을 찾기 보다는 원동력이 있어서 작업을 계속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실제로, 이번 4주간의 레지던스 기간 동안 약 7000장 정도의 사진을 촬영했는데, 힘든 작업이라기 보다 적극적인 취미활동처럼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최근 새롭게 관심을 갖고 있는 작업이나 변화가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최근 메조틴트 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판화와는 달리 부드러운 느낌이 많이 난다.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고 드로잉 같은 느낌도 나고 이런 경계의 모호함이 매력적이다. 운석에 대한 관심으로 인공지능 툴을 활용해 새로운 형태의 운석 이미지를 생성하고, 이를 판화 작업으로 발전시키는 중이다. 현재 A5사이즈 정도 크기의 세번째 시리즈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올해 예정된 전시 계획이 있다면 소개 부탁한다.

지난 4월 브르타뉴 레지던시와 이어지는 개인전이 오는 6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간 로귀비-드-라-메르(Loguivy-de-la-Mer) 항구에서 야외 사진전 형식으로 열린다. 


전시명 : Sigan (시간)

장소 : Loguivy-de-la-Mer 항구

주소 : Rue du Port Loguivy, 22620 Ploubazlanec

기간 : 2026년 6월 12일 - 9월 6일

https://bzhphoto.fr/



<현 경 기자 dongsimjeong@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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