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일의 한국 영화 이야기] 연재(2) 사라진 필름 속에서 되살아난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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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으로 맞선 암흑기, 칸과 경성의 두 ‘제1회’ 영화제

1939년 제 1회 칸 영화제 포스터 이미지 출처: CNC
우리에겐 저마다 삶의 가장 혹독한 겨울을 버티게 해준 이야기 한 편씩이 있다. 개인에게 영화가 위로라면, 거대한 역사적 압제 속에서 영화는 시대의 공기를 바꾸는 보이지 않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어두웠던 1930년대 말이라는 격동의 터널을 지나며 태어난 두 개의 «제1회» 영화제를 따라가 보면, 화려한 레드카펫 뒤에 숨겨진 문화적 자부심을 지키려 했던 뜨거웠던 시절의 기록과 마주하게 된다.
독재에 대항한 칸의 해변, 평화를 향한 ‘칸의 멈춤’
이야기의 첫 장은 이제는 세계 최고가 된 프랑스의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 원래 제1회 칸 영화제는 1939년 9월 1일에 막을 올릴 예정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베네치아 영화제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변질시키자, 이에 분노한 프랑스 예술가들과 정부가 «예술의 자유와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칸이라는 작은 휴양지에 모인 것이다.
8월 말부터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스타들이 대서양 횡단 여객선을 타고 도착했고, 미국인들은 윌리엄 디터레 감독이 연출하고 찰스 로튼이 콰지모도 역을 맡은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를 칸으로 보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문학의 거장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대작이다. 칸 영화제 측은 이처럼 프랑스의 위대한 문학적 자산을 미국 자본과 기술로 스크린에 옮겨낸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파시즘의 압제에 맞서는 양국의 연대와 문화적 자부심을 동시에 뽐내고자 했다. 그해 최고의 할리우드 기대작 <노트르담의 꼽추>의 홍보를 위해 칸 해변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거대한 복제품을 지으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운명의 개막 당일 오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자유 세계의 영화제를 꿈꾸던 칸은 단 한 편의 영화도 제대로 상영하지 못한 채 ‘공식 전면 취소’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불이 켜진 칸의 거리를 뒤로한 채 영화인들은 서둘러 피난 열차에 몸을 실었다. 칸은 그렇게 전쟁의 참혹한 강을 건넌 후인 1946년 9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짜 첫걸음을 다시 떼게 된다.
긴 전쟁이 끝나고 마침내 열린 1946년의 칸 영화제는 순위를 다투는 경쟁보다 인류의 화합과 치유를 선택했다. 평화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참가한 주요 국가의 작품 11편에 무더기로 최고상인 ‘그랑프리(Grand Prix)’를 수여하는 아름다운 결정을 내린다. 이때 데이비드 린 감독의 <밀회(Brief Encounter)>,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의 <무방비 도시(Roma città aperta)>, 르네 클레망 감독의 <철로변 전쟁(La Bataille du rail)> 같은 명작들이 전쟁과 식민지의 상처를 입은 인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자 했다.
경성의 '아리랑'
칸이 파시즘의 폭압 속에서 멈추어 섰을 때, 이보다 1년 앞선 1938년 11월 일제 강점기 조선의 경성에서는 한국영화의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제1회 조선영화제가 그 주인공이다. 월간 잡지 삼천리(1941년 6월호)는 그날의 뜨거웠던 풍경을 가슴 벅차게 전한다.영사기와 카메라 몇 대를 전시해 놓은 전시회장에는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는데 터져 나갈 듯한 인파 때문에 행사는 이틀이나 연장되었고, 시나리오 공모전에는 무려 150편이 넘는 청춘들의 글이 쏟아졌다. 나라를 잃은 암흑 속에서도 영화를 통하여 우리만의 이야기로 숨을 쉬겠다는 작은 외침이자, 조선인들의 손으로 일구어낸 문화가 담긴 영화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었다.

영화 <아리랑> 촬영팀. 가운데가 감독 및 시나리오 작가이자 주연배우인 나운규
이미지 출처: 한국 영상자료원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조선 최고의 영화를 뽑는 투표였다. 이미 한반도에서는 1935년 이래로 소리를 내는 유성영화의 제작이 활발히 시작되어 소리가 스크린을 채우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표 차이로 최고의 명작으로 선택하며 끝없는 존경을 보낸 작품은 다름 아닌1926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이었다. 당시 잡지 삼천리 기사는 아리랑을 보며 흐느끼던 조선 관객들의 마음을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이 영화는 조선인들 삶의 진실과 그 시대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그 시대의 페이소스(Pathos·비애)가 이 영화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관객은 조선의 인상, 풍경, 풍습을 넘어 바로 그것을 느꼈다.»
시네 라이브가 된 극장, 그리고 떼창의 역사
1926년 10월 1일,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의 개봉일. 무성영화 <아리랑>의 상영이 끝나갈 무렵, 극장 안에서는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 누군가 나직하게 노래를 시작하는 퍼포먼스가 시작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어둠 속에서 시작된 그 한 자락에, 약속이라도 한 듯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 모두가 목놓아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서로를 향한 위로가 뒤섞인 목소리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극장 지붕을 흔들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크린과 관객이 하나가 되어 호흡하는 완벽한 관객 참여형 상영이자, 한국 영화사 최초의 대규모 ‘떼창’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미치광이 행세를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순사에게 끌려 고개를 넘어갈 때 흐르던 그 멜로디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 목놓아 부르고 싶었던 영혼의 울분이었다.
오늘날 BTS의 공연장에서 한국어로 아리랑을 ‘떼창’하는 모습을 각종 매체들이 목격하고 전달한다. 이는 오래전, 머나먼 이국땅 미국으로 떠났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남긴 노래를 무대 위로 소환한다는 스토링텔링으로 BTS프로듀서의 기획이다. 어느 지인이 한 식당에서 « 어 흠 털털. 그러니까…이것이 1896년 미국 워싱턴, 조선인 유학생들이 미국의 인류학자 앨리스 플레처의 유성기 음반 녹음기 앞에서 불렀던 아리랑으로서… 국뽕과 …뭐라고 할까… » 라며 침을 튀기며 수다를 떠는 장면이 떠오른다.
한반도를 떠난 ‘아리랑’이 품은 역사는 비단 미국 땅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 1세대 한국영화인 나운규가 듣고 또 관객들에게 들려주려고 했던 ‘아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
<강창일>

파리 8대학 박사 및 객원연구원. 무성영화의 변사.프랑스 방방 곡곡을 누비며 연극영화를 통하여 한국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 한국 영화의 시작(Les Débuts du Cinéma en Corée, 2021) »과 « 현대 한국 영화 : 기생충의 서막(Le Cinéma Coréen Contemporain : A l'Aube de Parasite, 2023) »이 있다. SCÈNE ET IMAGE 회원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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