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트로트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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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4-28 00:55 조회 437 댓글 0본문
트로이 전쟁을 다룬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자기 대신 전장(戰場)에 나가 죽은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원한을 폴어주기 위해 전장에 나간다. 절친을 죽인 적장(敵將) 트로이의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원한을 푼다.
아킬레우스는 전장에 나가면 죽을 운명인 걸 알지만 절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장에 나간다. 그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아킬레스 건'인 발뒤꿈치다. 전장에 나가지 않으려고 여장(女裝)을 하는 등 별별 일을 다한 아킬레우스를 전장에 나가게 한 건 분노였다. 아킬레우스 역시 그가 죽인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의 화살에 뒤꿈치를 맞고 죽는다. 복수 대혈전이다.
분노는 복수를 통해 푼다. 트로이로 먼저 쳐들어 간 것은 막강한 그리스 연합군이다. 트로이를 멸망시킨다. 힘 있는 민족은 원한을 복수로 푼다.
하지만 한민족에겐 원한을 복수로 풀 힘이 없다. 임진과 정유 양(兩) 란(亂)과 병자호란이 그랬다. 자발적으로 타국을 침략한 민족이 아니다. 수동적으로 당하기만 한 민족이었다.
원한은 바깥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 복수로 원한을 풀 힘이 없다. 안으로 가져와 그 원한을 애지중지 주무른다. 피자 반죽하듯 마사지한다. 그러다 보면 원(怨)은 휘발되고 한(恨)만 남는다.
한을 애무하다 보면 어느새 정(情)으로 여과된다. 정을 삭이고 삭이면 사랑으로 승화된다. 더 이상 맺힘-풀림의 이항적 대립은 없다. 원과 한 그리고 정과 사랑 슬픔과 희망이 한 덩어리로 얽혀진다.
이 덩어리를 달래주는 노래가 트로트다. 우린 태생적으로 트로트 민족이다. 트로트로 한을 삭인다. 한은 푸는 게 아니다. 아니 풀릴 수 없다. 그러니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곱씹고 달랠 뿐이다.
한이 숙성되어 기다림으로 전환된다. 원(怨)을 원(願)으로 삭여낸다. 그 삭임의 통로가 트로트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나이 들어감에 대한 원망과 슬픔과 그리고 미션 임파서블 한 막연한 사랑에 대한 기다림과 바람이 얽혀 있다. 한국인의 한은 서양이나 동아시아의 원한과는 결을 달리한다. 한민족의 뿌리 정서가 한이다. 한이 많은 한민족이다.
<김영필 교수>

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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